제목 '큰 바위 얼굴' 永眠하시다
작성자 퍼옴
작성일 2009-02-11
조회수 24924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장차 마을에 바위 언덕에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傳說)을 듣는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 등 유명인사들을 두루 만났으나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어니스트.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한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아무 말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면서.

미국의 소설가 Nathaniel Hawthorne(1804∼1864)이 만년에 쓴 단편소설로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가지 인간상을 보여 주면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한 작품이다. 너새니얼 호손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대표작 《주홍글씨》(1850)를 비롯하여 교훈적 경향이 강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러한 경향의 작품이다. 즉, 위대한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의 세속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구를 거쳐 얻어진 말과 사상과 생활의 일치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학교 6학년 때로 기억된다. 겨울방학이 되어 6학년이 된다는 설레임으로 가득차 있을 때 새 학기 국어책을 받아 넘기다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게 되면서 나는 살아가면서 내 인생의 큰바위 얼굴을 만나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때 우연한 기회에 남궁석 전 정보통신부장관님을 만났다. 당시 모교 총장으로 계시던 은사님이신 김정배 총장님의 소개로 정보통신부 장관이신 이 분을 모시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우리나라를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의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나는 이 분을 측근에서 모시면서 비로소 내 삶의 '큰 바위 얼굴'을 만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인터넷의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고 산업사회의 후진국에서 지식정보화 사회의 선진국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계기를 바련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입지전적인 자수성가형의 성장과정이었다. 그는 용인시 이동면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태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시간에 그는 나무를 지고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보태야 했고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1년 후, 공부를 해야겠다는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 그는 약국에서 심부름을 하며 돈을 모아 선린상고 야간부에 입학한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2년 후의 일이었다. 그후, 그는 연세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하이텔과 유니텔을 창업하며 삼성SDS 사장을 역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다가오는 새로운 미래세계를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선각자적인 호소를 하게 되면서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를 주도하는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그를 모시면서 나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성장과정이 있는 분이었기에 더 친근감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일 처리 방식과 세상사를 보고 읽는 시각이 비교적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더 쉽게 동화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어떤 사건에 봉착하면 길게 고민하는 법이 없었다. 사건을 아주 단순화 시키기 때문이다. 단순화 시키고 나면 해결책은 두 가지만 남는다. 하느냐와 마느냐로 아주 단순화 되고 만다. 그리고 일단 결정이 되면 돌아보지 않는다. 치밀한 전략과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무섭게 몰아 부친다. 그의 진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나라가 단 시간에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한 과정을 한 번 돌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는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분야가 아직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 일을 위해 마지막 남은 땀 한 방울도 아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지난 해 봄에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병원 측의 권유에도 할 일이 많다며 입원을 거부하셨다가 결국 이렇게 어이없는 변고를 당하신 것이다. 측근에서 모셨던 몇몇 사람에게만 극비로 보안을 유지할 것을 엄명하셨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1월 16일 아침. 출근해서 사무실에 도착하면서 부음이 전해듣고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아아~ 큰 바위 얼굴이 돌아가시다니.... 향년 71세. 한창 일하실 나이가 아닌가.

한참 지나 정신을 차린 나는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장관님께 세배를 가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설날에는 꼭 세배를 가서 그 말씀을 드려야 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아아.. 그는 결국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그렇게 어이 없이 가버리고 말았다. 후회와 아쉬움 등등 만감이 교차한다.

4일장을 하는 동안 쉴새 없이 찾아오는 문상객들.

장관과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경력도 화려하거니와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던 터라 문상객들 사이에서는 저마다 아쉬운 탄식이 터져나오곤 했다.

그러나 화려하면 무엇하랴.

이승을 떠나면 결국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다만, 그가 잠시 와서 노닐다 간 흔적만 있을 뿐이다.

1월 19일 아침. 비로소 운구가 시작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뒤로 하고 영구차는 성남의 연화장으로 이동한다. 몇 년 전인가... 지인의 문상 때문에 왔다간 적이 있는 곳.

하늘도 아쉬워 어이가 없는지 잔뜩 흐려있다.

그가 살아 생전에 가장 가슴 아파했던 것은 외아들 훈이를 잃은 사건이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었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었다. 그가 삼성 SDS 사장 시절에 유니텔에 올린 '하늘나라에 먼저 간 아들에게'라는 글은 삼성 직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리게 만들었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화장구로 보이는 장관님의 시신을 모신 관.

저 좁은 창구를 통해 나는 장관님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결국은 저렇게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선영.

그는 이곳에 평소 가장 아끼고 좋아하시던 금송 한그루 아래에 수목장을 택하셨다.

은퇴를 결심하고 이곳에 농장을 마련하시면서 金松을 심어놓고 십여 년이 흐르면 이 농장을 학생들의 학습장으로 개방하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마지막 작별을 고하시는 사모님께서 고운 흙을 뿌리시고 나머지 유가족과 지인들이 차례로 흙을 뿌리는 동안 나는 돌아서서 농장을 내려다 보면서 눈이 부어오르도록 울고 또 울었다. 태어나서 내 피붙이가 유명을 달리 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많이 애닲아 한 적도 없었고 물론 이렇게 울어 본 적도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장관님을 찾는 사람들을 발걸음도 점점 줄어들겠지. 더군다나 제사도 모시는 이가 없으니....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분,

하지만 그는 내 삶에 하나의 큰 획을 그으놓으신 분, 바로 '큰 바위 얼굴'이셨다.

한 때 그를 모시면서 남은 것은 내가 그를 처음 모시면서 써놓은 책 한 권, <석기시대의 思考로는 철기시대인의 생각을 알 수 없다>가 전부이다.

내 마음 속에서만 영원히 살아계실 내 인생의 '큰 바위 얼굴'이시여.

부디 고이 잠드소서.

이 책을 삼가 고인의 영전에 바칩니다.